11월 네번째 이야기

브로콜리 너마저 - 괜찮지 않은 일(I'm fine.)


#11월 6일 토요일
고성으로 출발했다. 만나기로 한 12시를 훌쩍 넘겼다.
오랜만에, 갑자기 가는 고성행이라 시간 계산을 잘못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가는 길 내내 내 위치를 H형한테 읊었다.
H형네 커플을 만나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냥 편하게 막국수나 주꾸미 볶음 정도 먹을 줄 알았는데 H형은 무려 *★"한우"★*를 사주셨다.
(희재에게 전화로 고기 얻어먹었다고 했더니 한우를 사 맥였는데 자랑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냥 고기라고 말하면 어떡하냐고 H형에게 핀잔을 들었다.)

H형네 집으로 가서 빔프로젝터로 드라마 DP를 정주행했다. 꽤 재미있었다.
드라마 속 구교환 배우님이 너무 반짝였다. 빛과 소금같이.

드라마를 다 보고선 H형은 '그래서 희재와 관련된 무슨 고민을 이야기하려고 여기까지 왔냐' 며 분위기를 바꿨다.
나는 2년 전부터 어제까지 겪은 일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무겁게 시작했지만, 이 이야기를 여러 번 해서인지 내가 느끼는 사건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졌다.
물론 H형도 "그 정도로... 희재가 인기가 많거나 잘생긴 편은 아니잖아. 아니야?" 
"희재가 너 몰래 번개를 하거나 딴 남자랑 잔다거나 하는 그런 타입의 애는 아닌 거... 너도 알잖아?"라며 이야기의 무게를 줄였다.
H형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는 나도 나대로 의심을 키우며 스트레스를 받아온 일과 내가 충분히 실망할 수 있는 희재의 행동 정도로 정리했다.
H형은 친구 커플이 나와 비슷한 일로 헤어진 이야기를 들려주며 결국은 내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선택을 하는가, Stop or Go through에 달렸다고 말했다.
10년째 연애 중인 H형과 L형은 귀엽다는 눈빛을 보내며 우리도 많은 갈등을 겪었고 더 단단해졌다고 했다.

#11월 12일 금요일
드디어 상담 날이 다가왔다. 전날 희재에게도 선생님께 다 말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아침 9시 상담이라 늦지 않도록 일찍 나섰다.
상담 센터에 도착하니 카운터 직원분이 당황한 낯빛이었다.
선생님이 조금 늦으실 것 같다며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내가 이야기할 거리가 산더미인데~라며 속으로 툴툴댔다.
상담 선생님은 지각하실 분이 아닌데 무슨 일이 생기셨나 걱정도 됐다.
선생님은 아침에 발목을 약간 접질려 급하게 병원을 다녀왔다고 하셨다.
나는 오늘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며 선생님을 재촉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선생님은 참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일단 식이 씨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연인분에게 솔직하게 전부 이야기하신 거는 너무 잘하신 거예요."
"식이 씨가 하는 노력을 당연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희재 씨는 당연히 미안해해야 하고 혼이 나야 하죠. 식이 씨도 화를 내지 않고 쿨하게 여기며 괜찮다고 생각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엔조이지 않을까요?"
"외도 혹은 바람을 피우는 이유는 대게 두 가지예요. 동등한 관계가 아닌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이 다른 병을 찾아 갑이 되려고 하는 경우와 상대에게서 결핍이 채워지지 않을 때죠."
"식이 씨에게 미안한 말이 될 수 있겠지만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보다 결핍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어요. 이성애자들은 서로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지만, 동성애자들은 서로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나 창구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고 사회에 드러내지 못하고 몰래 만나야 하기 때문에 헤어지더라도 서로 사귀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몇 없는 거죠. 그렇기에 더더욱 서로에게 솔직해져야 하고 끈끈해져야 해요."

희재의 부모님이 희재를 당연하게 여겨 희재가 상처를 받았듯 희재가 나를 당연하게 여겨 나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
내가 부모님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티 내지 않아도 나의 노력을 알아봐 주길 바라듯 내가 희재에게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봐 주길 바랐다는 것.
결국은 두 사람의 가정에서 일어난 개인의 문제들이 연장선상으로 두 사람에게 연결되어 일어난 문제라는 것이었다.

상담을 마치고 나와 곧바로 희재를 보러 갔다. 같이 점심을 먹고 난 뒤 커피를 마시며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내용을 전부 읊었다.
희재도 반대편에서 어두운 슬픔이 표정을 하고선 담담히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오늘 역시 희재는 마음이 무거워져 입도 같이 무거워졌나보다. 그리곤 나중에 톡으로 말했다.
형이 최선을 다하고 있단 걸 알고 있고 자신도 상처받고 서운하더라도 괜찮다고.
나는 이기적이던 그 말이 오히려 진솔해서 좋았다.

그날 오후 희재는 톡으로 갑자기 자기를 사랑하냐고 물었다. 물론 많이 사랑한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희재는 "식이한테 나는 필요한 존재야?"라며 물었다.
질문이 이상했다. 희재가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저 질문을 희재에게 되물었다.
"내가 반대로 너한테 나는 필요한 존재야? 라고 물으면 어떨 것 같아?"
"필요하다기보단 소중하다는 단어가 어울릴 거 같아."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희재는 전에 내가 '나는 희재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고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고 했다.
나는 "아. 그래서 '필요'라고 물어본 거였구나."
"필요라는 건 산소같이 반드시 없으면 안 되는 이라는 뜻이잖아."
"필요하지 않더라도 중요한 것이 더 높은 가치이지 않을까?"
"너를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보단 소중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맥락으로 저런 말을 한 거야."라고 말했다.
희재는 알아들었는데 너무 슬프다고 했다. 

11월 세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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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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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첫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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