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리고 커밍아웃

페퍼톤스 - Thank you

 4월의 마지막 날, 부처님 오신 날, 그리고 14년도 지리산 여행 이후 오랜만에 친구 셋이서 여행을 떠나는 날.
황사 없이 화창한 날씨와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늦봄과 초여름 그 어딘가를 닮은 노래가 어디 없을까. 
그날을 기록할 만한 노래가 어디 없을까 하다가 이 노래를 찾았다. 
그 친구는 내 글을 볼 수 없겠지만 진심이다.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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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직에 성공한 J가 긴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부산으로 내려온다고 했다.
같이 보게 된 M이 자기 차를 타고 가까운 곳에 놀러 가자고 해서 내가 울산 쪽으로 놀러 가자고 했다.
J는 그래도 틈틈이 봤지만, M은 다른 친구들과 같이 모여 본 이후 8개월 만이었다.

 친구들끼리도 친함의 정도나 순위가 있듯이 
커밍아웃을 하고 싶은 친구 리스트 중 꽤 높은 순위에 있던 친구였는데
타이밍이 맞질 않아서 하질 못했다.
처음 J한테 커밍아웃을 할 때는 서로 펑펑 울면서 토해내듯 고백했는데
몇 번 커밍아웃을 하다 보니 조금은 가볍게 하는 법도 익혔고 사실 그게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물론 잘 이해해 줄 사람들에게만 하니까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ㅎㅎ

 울산 쪽에 경남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간월재와 국가 정원으로 선정된 태화강 쪽 십리대숲길을 갔다.
간월재는 산 중턱 넓은 갈대밭과 탁 트인 울산 전경이 한눈에 보였고 대나무 숲길은 은하수를 수 놓은 듯 너무 아름다웠다.
다들 저질 체력들이라 가벼운 산책정도 계획한 여행지 였는데 
내가 예상한 것보다 걸어가야 하는 거리가 멀어서 다들 많이 지친 상태로 출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차 안, 대각선 뒷좌석에 앉아 노랗게 내리는 실내등 아래로 
특이한 수집욕이 있는 M의(M 차에 탄 사람이 쓰는) 방명록을 남겼지만 
글을 쓰는 내내 딴생각 뿐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
초조한 마음에 입술은 타들어 갔고 집 근처에 다 다라서야
침을 크게 삼키고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걷어내듯 애써 높은 톤으로 입을 뗐다.

나 : M아, 오늘 내한테 틈틈이 전화 오던 사람 있잖아, J는 알고 있는데 
     다음에 이렇게 셋이 모이면 내가 소개해 줄라고 그라는데 괜찮나?

M : 음, 나야 좋지. 근데 여자친구가?

나 : 으응.. 애인이지.

M : 그냥 평소 너 대하는 대로 해도 되제? 내가 또 커플 이간질하는데 전문이거든 ㅋㅋ 

J : 니는 왤케 전문이 많냐? 꼰대 전문에다가 이간질전문에다가.

M : 내가 처음 그렇게 소개받으면 일부러 좀 짓궂게 하거든. 
    두 번째부터는 앞으로 더 마주칠 수 있으니까 그때부터는 고려해서 살살하는데.

나 : 나는 딱히 상관없다.

M : 근데 셋이서 볼라믄 또 몇 달 뒤 아니가.

J : 다음에 또 부산 내려오면 미리 연락 돌릴게.

(30초 뒤)

나 : 그런데 어.. 니가 혹시 좀 불편해할 수도 있는데 괜찮나?

M : 왜?? 난 괜찮은데?

나 : 사실 그.. 걔가 남자거든.

M : 아 진짜? 잘됐네. 그럼 더 갈구기 편하겠네! ㅋㅋ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었는데 
낮에 마셨던 홍차 쉐이크 때문인지 머릿속에 초침이 가듯 째깍거렸고
저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았다. 
대화는 영화필름처럼 선명했고 저 마지막 문장은 점점 커졌다. 
놀라웠고 고마웠고 미안했으며 행복했다.
그 친구는 내 글을 볼 수 없겠지만 진심이다. 정말 고마워. 

덧글

  • 2020/05/06 10:5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0/05/29 09:02 # 삭제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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