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이후


설(SURL) - 눈

온스테이지 유튜브를 뒤적거리다 발견한 밴드.
보컬 때문인지 언뜻 혁오 밴드와 겹쳐 보이지만 
내가 느낀 좀 특이한 점은 드럼이 침착하다? 설익은 듯 풋풋하고 차분한 드럼 위에 
발맞춰 걸어가는 듯 얹어지는 수준급 기타와 매력 있는 목소리가
한겨울 소복히 내려 포근한 눈 같다가도 가을비 내려 축축이 젖은 쓸쓸한 낙엽길이 된다.

오늘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일기를 쓰는 지금도 주구장창 이 노래만 듣는다.

'다음은 이러지 않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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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부산을 막 지나간 이후 오후.
한 침대 위, 몸을 바짝 붙여 부둥켜안고 같이 유튜브를 보던 애인의 휴대폰에 날아든 7글자 정도 되는 문자가 시작이었다.
누구에게 문자가 와도 '누구야! 해명해!'라는 항상 같은 장난스러운 물음에
내게 위화감이 역력한 표정을 하고선 단숨에 들킬 거짓말들을 늘어놓다가 
그러면 문자 내역 좀 보여달라던 말에 당황해 처음으로 차가운 눈빛을 보내던 네게 실망했다.

그리곤 차분히 얘기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몇 달 전 네 계정을 빌려 게임하던 어느 날, 날아오던 귓말에 주르르 달려있던 대화 기록들을 봤었고
그땐 아무렇지 않았다고. 당당하고 한결같은 모습에 의심따윈 없었다고 말했다.
어쭙잖은 어린애들 가지고 노는 온라인상의 썸타는 놀이는 내겐 별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네가 당당해야 했다고 말했다.
거짓말은 네가 말하는 다른 진실마저 의심하게 하고
보여주지 않던 문자 속 내용은 보지 않아도 뻔하고 오히려 더 상상하게 된다고.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주르르 흐르던 눈물에 많이 놀랐나 보다.
왜 형이 우냐며 연신 미안하다고 얘기한다.
서로 꼭 껴안은 채.

내 속에서 맴돌던 물음들은 죄다 너를 탓하는 말들뿐이라 속으로 삼켰고
사과를 쿨하게 받아줄 수 있을 것 같던 마음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끌어안고 누워 눈물만 훔쳤다.

그러다 문득 과거에 썼던 일기가 생각났다. 2017년 7월에 쓴 마음의 정처.
너와 사귄 지 2달쯤 되던 날의 일기.
부끄러운 마음에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쓰지도 못하고 감정만 적혀있던 글이었다.
애인에게 일기를 보여주며 그때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전 애인을 마지막으로 만났었다고.
나 스스로 당당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만나자마자 무너져 내리는 마음에 내 스스로 정말 많은 실망을 했었다고
네게 너무나 미안했고 더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 나 스스로 다짐했었다고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미안해하기보단 너 스스로 다짐하라고 이야기했다.

이 뜬금없는 고백을 듣고선 애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막상 말하고 나니 의도를 오해할까 봐 걱정도 됐고
이런 상황에 이런 고백을 하는 내가 웃겨서 피식거렸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 풀리더라. 스스로 다짐하라는 저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제야 네 사과를 받아줄 수 있었다.
물론 속이 좁아터진 나로서 다 풀리진 않았다. 흥칫뿡.
그래서 이렇게 구구절절 글로 남기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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